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트 불교 (문단 편집) ==== 오해와 편견 ==== || [[파일:vajradhara.jpg|width=400]] || || 얍윰(yab yum)[* 티베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얍'과 어머니를 뜻하는 '윰'이 합쳐진 단어로 남녀합신상(男女合身象)을 가리킴.] 형상을 한 지금강불. 존재 내면의 남성적 에너지와 여성적 에너지의 통합을 상징한다. 대락(大樂)을 상징하는 남성 에너지와 불이(不二)의 지혜를 상징하는 여성 에너지의 결합을 통해 참된 본성을 자각할 수 있다. || 후기 밀교 수행법 중에는 성에너지를 이용한 수행도 있으나 이를 '저급하다', '좌도(左道, left-handed) 밀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딴뜨리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과거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혹은 동양의 유교적 편견)에 해당한다. 밀교에 대한 이해가 축적된 현대에는 이미 '''불교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상징적,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밀교의 부모불(혹은 쌍신불, 얍윰Yab-yum)은 지혜와 방편, 혹은 현상과 공성의 합일을 상징한다. 수행에 있어서도 '''실제 딴뜨릭 수행자 간의 직접적인 육체적 결합 대신 관상(觀想)[* 본존, 만다라 등의 이미지를 심상화(心象化)하는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학자 정성준의 설명에 따르면, 인도 후기밀교의 경우 전법스승인 아사리(阿梨)와 수행을 전수받기 위한 제자의 자격은 오계를 비롯해 보살계 뿐만 아니라 삼매야계와 같이 행위가 아닌 내면적 의식을 문제삼는 등 엄격한 계율에 의해 자격을 심사받으며, 밀교수행의 자격도 현교(顯敎)의 경론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시험을 거쳐야만 비로소 관정(灌頂)의식을 통해 밀교수행에 참여할 수 있다. 실제 인도의 밀교수행의 전통을 계승한 티벳사원의 현실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에 의해 수행이 이루어지며, 밀교의 관정의식과 입문의식에 동원되는 성과 관련된 도구들도 남존(男尊)의 보리심을 상징하기 위한 술이나, 여존(女尊)을 상징하는 염색된 물을 이용하는 등 인간의 실상(實相)을 불성(佛性)으로 관조하고 자각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들이 사용되고 있다. 후기밀교의 한 시대에는 관상(觀想)에 의지하더라도 성적(性的) 관상을 실천하는 수행이 전통적인 비구계의 율의(律儀)를 범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는데, 이와 관련한 대목이 《비밀집회딴뜨라》의 관정의식을 다룬 《제4관정의궤, Sakiptbhiekavidhi》에 전해진다. 저자는 위끄라마실라 사(Vikramala 寺)의 육현문(六賢門)의 한 사람인 와기슈와라(Vāgīśvara)로 그는 《비밀집회딴뜨라》의 유파인 즈냐나빠다류에 속하며, 현밀(顯密)과 계학(戒學)에 능통한 당시 인도에서 가장 번영한 사원의 학두(學頭)였다. 그가 다룬 제4관정은 인도후기밀교에서 중요시되는 것으로 ①병(甁)관정, ②비밀(秘密)관정, ③반야지(般若智)관정, ④제사(第四)관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략히 소개하면 병관정은 물, 보관, 금강저, 금강령, 명명식(命名式)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기물(器物)들은 만다라의 중심을 이루는 오불(五佛)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사리는 제자에게 기물을 부여함으로써 오지(五智)를 성취할 것을 명하는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인 비밀관정과 세 번째 반야지관정은 성적인 요가를 수반하는 과정이다. 먼저 제자는 관상(觀想)을 통해 스승에게 반야모(般若母)를 바치는데 《비밀집회딴뜨라》에는 “푸른 연꽃의 눈을 가졌고, 16세의 나이로 아름다우며 도살자(屠殺者)의 딸이다”라고 묘사하고 있으나, 문헌에는 즈냐나빠다류의 전통에 입각해 문수금강(文殊金剛)의 화현으로 대신하고 있다. 비밀관정은 아사리에 의해 공성(空性)을 상징하는 반야모와 육신의 현상세계로 현현한 방편(方便)의 합일을 통해 반야와 방편의 합일이라는 상징적인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반야지관정은 제자로 하여금 합일을 상징화한 매개물을 통해 반야(般若)의 대락(大樂)을 체험하게 된다. 마지막 단계의 제4관정은 ‘언어에 의한 관정’으로 아사리는 구두(口頭)로 제자에게 비의(秘義)를 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제4관정의궤》에는 대론자가 “(반야와 방편의 합일을 상징한) 이근교회(二根交會)의 의식이 어찌 비구의 율의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와기슈와라는 “삼계에 태어난 인간과 제천(諸天) 등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유루(有漏)의 애착을 향수하는 것으로 탐욕을 향수하는 것은 비나야 등에서 금해지고 있는 것이지만, 삼계(三界)를 초월한 신체를 지니고, 유식(唯識)을 자성으로 하는 문수금강(文殊金剛) 등이 현현한 여성들은 그런 류가 아니다”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론자는 다시 “비나야 등에서 금지되고 있는 외적인 갈마인모(羯磨印母)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정(適正)하다고 할 것인가?”라고 반론하고 있다. 여기서 갈마인모란 현실세계의 육체를 가진 반야모를 가정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와기슈와라는 “진언이취(眞言理趣)에 있어서 실재하지 않는 색(色) 등의 일체의 사물을 자심(自心)의 현현(顯現)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꿈과 같은 문수금강을 본성으로 전변한 갈마인모들도 환(幻)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그녀와의 성적유가를 포함한 관정을 실수(實修)한다 하더라도 청정하며, 과실이 없기 때문에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다. 반면 와기슈와라 후대에 생존했던 인물로 같은 사원의 대학승(大學僧)이었던 아티샤(Atiśa)는 그의 명저인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에서 “범행자(梵行者)는 비밀과 반야의 관정을 실수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하고, 계를 범할 시 악취(惡取)에 떨어지는 죄과를 받는다고 경고하고있어 와기슈와라와 반대의 입장에 있다. 같은 시대의 아브야까라굽타(Abhaykaragupta)는 《금강의 화환(Vajrāvalī)》에서 “일체가 공성이기 때문에 갈마인모도 또한 공성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그녀와의 유가도 율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고, 반면에 " ‘결고(潔高)한 진실을 신해(信解)하지 않는 비구’인 경우 갈마인모(磨印母)가 아니라 지인(智印)을 사용한다" 하여 와기슈와라와 아티샤와의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청사(靑史)》에는 아브야까라굽타 자신은 위끄라마실라사의 학두로 있으면서 평생 비구의 불범계(不犯戒)를 지키며 결정코 성적 유가를 행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42|정성준,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사리자가 말했다.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을 이루는 것 아닙니까?” > >천녀가 말했다. >“부처님께서 자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체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설한 것입니다. 자만을 완전히 벗어난 자들에게는 ‘일체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본성이 그대로 해탈’이라고 설합니다.” >---- >《설무구칭경(유마힐경)》(장순용 譯) >통상적으로 우리를 한 가지 불만상태에서 또다른 불만상태로 몰아대는 것과 동일한 욕망 에너지가 딴뜨라의 연금술을 통해서 초월적인 희열과 지혜를 체험하는 것으로 변화된다. [...] > >욕망의 에너지가 우리의 불만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만의 원인, 즉 실제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무지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용된다. > >티베트의 딴뜨라불교에서는 이렇게 욕망의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것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한다. 나무에서 생겨난다는 어떤 벌레들이 있다. 그들의 생애는 나무줄기 속 깊은 곳에서 부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자신들이 태어난 바로 그 나무를 먹으면서 자란다. 그와 마찬가지로 딴뜨라의 변화 수행을 통해서 욕망은 통찰적 지혜를 낳고 그 다음에 그 지혜는 그 자신을 태어나게 한 욕망을 포함해 우리 마음을 가리고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없애버린다. > >따라서 우리는 통상적인 욕망의 작용과 깨달은 이의 작용은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딴뜨라에서는 욕망에서 일어나는 희열의 체험이 마음을 확장시켜서 우리가 모든 제한을 극복할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욕망의 대상과 접촉하는데서 오는 쾌락은 우리의 주의를 제한하고 더 강하고 더 좋은 쾌락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 >[[http://naver.me/xswx7VVV|라마 툽텐 예셰, 《딴뜨라 입문》(주민황 譯)]] >어떤 때에는 잡신(雜神)들이 잘생기고 피부 좋고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매력적인 청년으로 변신하여 나타나기도 했다. [...] 음욕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 색정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행위를 했지만 그 자체를 환상으로 보는 삼매에 드니 대부분 실체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어 보살의 대치법(對治法)을 수행하니 몇몇은 검은 시체로, 몇몇은 늙고 추한 모습으로, 몇몇은 문둥병 환자로, 몇몇은 귀머거리, 장애자, 바보와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여 모두 사라져버렸다. >---- > [[http://naver.me/xv0RTCs9|겔와 장춥,《예세초겔의 삶과 가르침》(설오 譯)]] 성문승에서는 대체로 번뇌를 억제하는 점진적인 방법을 통해 적정(寂靜)을 유지하고 번뇌의 소멸을 추구한다. 반면 대승의 바라밀승에 이르게 되면 《유마경》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보살은 번뇌의 본성과 보리(菩提)의 본성이 모두 청정하고 공(空)하다는 불이(不二)의 견지(見地)에서 번뇌를 회피하지 않고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번뇌는 자연히 소멸된다. 성문과 달리 보살에게는 번뇌로 인해 남겨진 습기(習氣) 혹은 소지장(所知障)의 제거가 주된 관건이며, 소지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번뇌장 역시 함께 제거된다. 더 나아가 대승의 금강승에 이르러서는 독초(毒草)를 이용해 효능 좋은 약을 만들듯이 더욱 적극적으로 번뇌를 활용하여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의 결과를 얻는 특별한 방식을 따른다.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는 점은 바라밀승과 금강승이 비슷하지만, 번뇌 자체가 곧 그대로 방편이 되는 것은 금강승만의 특징이다.[* 이른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를 주창하는 선불교와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성(空性), 불이(不二)의 견지(見地)에서 이루어지는 인습적인 도덕율의 초월, 스승과 제자 간의 밀접한 사자상승(師資相承) 관계, 돈오(頓悟)의 가능성 등 선불교와 밀교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러한 금강승의 급진적ㆍ전복적 발상은 고통받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최대한 신속히 성불(成佛)하기를 바라는 절실한 보리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보리심이 없다면 금강승을 수행할 이유도 없고 수행해서도 안되며, 도리어 타락하여 막중한 악업을 지을 수도 있다.''' '''여전히 바라밀승과 마찬가지로 금강승에서도 번뇌는 고통의 원인이기에 극복의 대상이며, 최종적으로 "나무에서 생겨난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듯" 번뇌에서 얻는 에너지는 수행을 통해 번뇌 그 자체를 제거하는데 이용된다. 성적 요가 수행시 가장 미세한 의식을 활용해 공성을 깨닫게 되면 번뇌와 지혜라는 두 상반된 마음은 함께 공존할 수 없어 공성을 깨닫는 즉시 성욕을 비롯한 모든 번뇌는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통상적인 성적 행위는 끝없는 갈망과 불만, 흐릿하고 둔한 의식 상태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금강승에서는 단순한 성적 희열만을 깨달음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금강승의 성적 요가는 범속한 성행위와는 다르다. 성적 요가를 수행하려면 바라밀승과 금강승의 공통된 도(道)인 보리심과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를 기반으로 대부분의 거친 번뇌를 제거하고 미세한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예를 들어 티베트의 대표적인 여성 수행자 예세 초겔(ye shes mtsho rgyal)은 성적 요가를 행한 금강승 수행자였지만, 여러 잡신(雜神)들이 매혹적인 남성의 몸으로 유혹하여도 전혀 동요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번뇌만이 남아있던 상태였다. 또한 예세 초겔은 기(prāṇa), 맥(nāḍī), 명점(bindu) 수행으로 신체의 미세한 에너지를 조절하여 자재(自在)한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보리심의 동기와 공성 인식, 금강승의 스승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 '''스승의 지도와 별해탈계ㆍ보살계ㆍ싸마야계의 통제 하에''' * '''딴뜨라의 상징과 비유, 철학, 기법, 내적 논리에 관한 이론적 지식과 고도의 집중력을 갖추고''' * '''정교한 의식과 명상, 신체 에너지 운용을 거쳐 이루어지는''' 금강승의 번뇌 활용은 대승 유가행(瑜伽行)의 정점으로서 마치 독성 있는 원재료로부터 유효 성분만을 추출하여 정제하는 정밀한 제약(製藥) 공정과도 같다. 번뇌는 중생의 가장 강력한 적이지만, 동시에 번뇌로 작용하는 의식 또한 의식의 일종이므로 밝음과 인지라는 의식의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금강승 수행을 통해 번뇌로 작용하는 오염된 의식으로부터 오염만 제거할 수 있다면, 이는 즉시 공성을 인식하는 강력한 의식으로 전환되어 공성을 인식하는 힘은 더욱 배가(倍加)될 수 있다. '''단, 주의할 점은 금강승의 번뇌론이 결코 도덕윤리의 전적인 폐기나 아노미(anomie), 막행막식(莫行莫食)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리심을 바탕으로 성문승의 별해탈계ㆍ바라밀승의 보살계ㆍ금강승의 싸마야계 모두를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금강승의 윤리ㆍ계율관은 오히려 다른 승(乘)에 비해 더욱 확장ㆍ심화된 다층적 규범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출가한 사미, 사미니나 비구, 비구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직접적인 수행을 하지 않는다. 일체 음행(淫行)을 금하는 출가계를 수지(受持)하였기 때문이다.''' 아티샤가 《보리도등론》에서 밝혔듯 무상요가를 통해 얻는 공덕보다 출가의 공덕이 더욱 크고, 또한 만일 구족계를 수지한 승려가 성적 요가를 수행할 경우 바라이죄[* 비구나 비구니가 승단을 떠나야하는 무거운 죄. 살인, 음행, 절도, 대망어(아직 깨닫지 못한 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깨달은 성자인 척 대중을 속이는 거짓말)가 이에 해당한다.]를 범하여 매우 엄중한 과보를 받게 되므로 수행을 성취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을 얻게 된다. 대신 비구, 비구니 같은 범행자(梵行者)는 직접적인 육체적 결합 대신 관상(觀想)으로 대체할 수 있다. || [[파일:Buddha-Weekly-vajrayogini-high-Buddhism.jpg|width=400]] || || 지혜의 다끼니(dakini, 空行母) 본존인 바즈라요기니(Vajrayogini) || >여성은 하늘이며, 여성은 법(dharma)이다. >여성은 실로 가장 수승한 고행(tapas)이다. >여성은 붓다이며, 여성은 승가이고, 여성은 반야바라밀이다. >---- >《찬다마하로샤나 탄트라, ⅷ: 29-30》 >[[https://naver.me/GaTCXZz1|폴 윌리엄스, 앤서니 트라이브, 알렉산더 윈, 《인도불교사상(개정증보판)》(안성두, 방정란 譯)]] '''금강승에서 여성을 단순히 성력의 심볼로만 취급한다는 주장도 온당치 못하다. 비록 금강승 전통에서 여성이 갖는 실질적인 지위와 역할에 관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밀승과 뚜렷이 대비되는 여성성의 긍정과 여성 수행자의 진취적 면모를 금강승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금강승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별 없이 남녀 모두 동등한 수행자로 취급되며, 때로는 여성이 스승이 되어 남성 수행자를 지도하는 등 금강승 수행자로서의 여성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금강승의 계율인 사마야(samaya)에서는 여성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미란다 쇼(Miranda Shaw) 리치몬드대 교수는 [[http://naver.me/xT7obuTJ|미란다 쇼,《열정적 깨달음: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조승미 譯)]]에서 딴뜨릭 불교는 대승 불교의 윤리적, 철학적 원칙을 함께하지만, 상징과 의식 분야에서 친밀감과 성(性), 젠더와 체현을 해탈의 길에 포함시키는 특징을 보인다고 말하였다. 남녀가 나란히 등장하는 패턴은 남성과 여성이 착취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서로 일깨워주는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과 숭고한 이상을 나타낸다. 여성과 여성의 가르침이 등장하고 여성의 에너지와 영적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딴뜨릭 종교성의 특징이다.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은 격렬한 지혜의 화염 속에서 즐겁게 춤추며 태연히 번뇌의 시체를 밟는 거침없고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들은 가부장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열정적이고 자유로우며 깨달은 여성들이었다. 리타 그로스(Rita Gross) 위스콘신대 교수 또한 그녀의 저서 [[http://naver.me/xT7obIp8|리타 그로스,《불교 페미니즘: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옥복연 譯)]]에서 금강승 불교만큼 여성의 정신적 발달과 성숙에 유리한 종교를 찾기 힘들다고 강조하였다. 그로스는 불교 전반에 걸친 남성 중심적 관행과 가부장성, 그리고 비구니 승단 없이 사미니 승단만 존재하는 티베트 불교 교단 내의 열악한 여성수행자의 지위에 대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비판하였다.[* [[인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전해질 때부터 비구니 계맥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 승단에는 초기부터 비구니 없이 사미니만 존재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일부 티베트 불교 여승들(특히 외국인 출신의 여승들)이 한국, 대만, 홍콩 등에서 비구니계를 받았고, 티베트 불교 종단에서도 이들을 비구니로 인정하였지만 티베트 불교 종단 자체적으로 비구니계를 수계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br]제14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 여승들의 권리 확대에 관심을 갖고 티베트 불교 내부에 비구니계를 도입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왔다. 달라이 라마는 여자 승려도 남자 승려와 동등한 승가교육을 받고 게쉬(dge bshes)에 상응하는 불교 박사 학위인 게쉬마(dge bshes ma)를 수여받을 수 있게 허용하였다. 또한 1987년부터 티베트 불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주도 하에 붓다 재세 시에는 존재했던 비구니 승단이 왜 티베트에는 없는지, 티베트에서는 왜 비구니 구족계를 주지 않는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br] 그러나 만일 비구니 계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아시아 비구니 승단에게서 비구니계를 수계할 경우 첫째 티베트 불교가 자체적으로 원로 비구니 12명을 배출할 때까지 이부승(二部僧) 수계식은 외국인 비구니들이 집전할 것이라는 점, 둘째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는 법장부의 《사분율》을 따르는 반면 티베트 불교는 근본설일체유부의 《율경근본율》을 따르므로 기준이 되는 계목이 다르다는 점 등의 이유로 티베트 불교 종단 내부의 반대 여론이 강하여 달라이 라마 역시 비구니계 도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727|이향순, 《여성불교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생각》]] 2022년 6월 21일 부탄불교 최고 지도자인 제 켄뽀의 수계로 144명의 비구니가 탄생했다. 이로써 적어도 티베트 불교권인 부탄에서는 자체적인 비구니 계맥을 갖추게 되었다. [[https://apnews.com/article/religion-asia-tibet-buddhism-bhutan-84b5f22bb6efeea0e7c6e1a446ba9978|#]] [[https://www.buddhistdoor.net/news/144-buddhist-nuns-receive-full-ordination-at-landmark-ceremony-in-bhutan/|#]] [[https://www.buddhistdoor.net/features/gelongma-dompa-dgeslongmai-sdom-pa-the-blessing-of-bhikshuni-ordination-in-bhutan/|#]]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5530|#]]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0458|#]]]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타 그로스는 티베트의 금강승 불교가 다른 어떤 불교 분파보다 여성성을 중시하고, 뛰어난 여성 스승들이 많이 존재하며, 수행에 필수적인 여성 상징들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불교의 가부장성을 극복하고 불교를 성평등적으로 재구축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현대 티베트 불교 여성 수행자들의 면모는 [[https://naver.me/GjdbAt2Z|미카엘라 하스, 《다키니 파워》(김영란, 장윤정 譯)]], [[https://naver.me/xwDLBKgX|비키 메켄지,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세등 譯)]]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